한국 생활·전통문화 기록

평상(마루 앞 평상) 문화의 쇠퇴

기록하는생활민속가 2025. 12. 18. 12:03

평상은 가족과 이웃이 자연스럽게 교류하던 생활공간이었지만 주거 구조 변화와 생활 방식의 변화 속에서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평상 문화의 의미와 쇠퇴 과정을 생활사 관점에서 분석합니다.

 

제가 민가 조사와 구술 기록을 다루면서 가장 자주 만난 장면 중 하나가 평상입니다. 평상은 단순한 나무 구조물이 아니라 집안과 이웃을 잇는 경계 공간이었습니다. 여름에는 평상에서 바람을 쐬며 한나절을 보내고, 이웃이 오가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오가던 장소였습니다. 특히 노년층의 구술에서는 평상을 기억의 중심으로 두는 경우가 많아, 그만큼 생활문화로서의 비중이 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주거 구조와 생활 방식의 변화 속에서 평상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평상이 지녔던 생활적 기능

평상은 마루와 마당의 경계를 잇는 구조물이었습니다. 여름철에는 시원한 바람을 맞고, 겨울이 되면 햇볕을 피하거나 일시적으로 작업물을 두는 공간으로 활용되었습니다.


특히 평상은 ‘안마당의 중심부’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집안 활동의 흐름을 모아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제가 조사한 여러 집에서는 평상이 단순한 휴식 공간이 아니라

  • 곡식을 널어두는 임시 건조 공간
  • 면담과 대화를 나누는 손님맞이 공간
  • 이웃이 잠시 머물다 가는 교류 공간
    으로 활용된 사례가 많았습니다.

이웃 간 자연스러운 교류의 무대

평상은 이웃 간 왕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던 곳이었습니다. 누군가 지나가다 보면 잠시 앉았다 가고, 마을 소식이나 가족 이야기를 풀어놓는 자리였습니다.


구술 기록에 등장하는 “평상 앞에서 하루가 다 갔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라 당시 생활의 밀도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이러한 교류는 마을 공동체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평상에서 서로를 자주 만나니 갈등이 쌓일 틈이 적었고, 작은 문제가 있으면 자연스레 대화를 통해 풀렸습니다. 평상은 일상의 조정 공간이자 관계 유지 장치였던 셈입니다.

여름철 생활과 계절 감각을 담은 공간

평상은 계절 감각을 가장 생생하게 담아내던 구조물이기도 했습니다.
여름이면 밤잠을 설치기 쉬워 평상에서 모기향을 피우고 한밤중까지 대화를 이어갔다는 구술이 매우 많습니다.
여름밤의 시원한 바람과 쏟아지는 별빛을 함께 나누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의 실내 중심 생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계절의 흐름이 평상 생활에는 자연스럽게 담겨 있었습니다.

평상은 또한 ‘집 밖에서 보내는 시간’을 상징했습니다. 이는 전통 주거에서 실내와 실외가 뚜렷하게 분리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평상 문화가 쇠퇴하기 시작한 배경

1. 주거 형태 변화

평상 쇠퇴의 가장 근본적 원인은 주거 구조 변화였습니다.
한옥이나 기단 마루가 있는 집이 줄어들고, 현대식 주택과 아파트가 늘어나면서 평상 자체를 놓을 공간이 사라졌습니다.
실내 생활 비중이 커지자 평상이 지니던 의미도 함께 사라졌습니다.

2. 관계 구조의 변화

이웃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던 문화가 약해지면서 평상의 기능도 약화되었습니다.
도시화와 개인주의 확산 속에서 이웃 간 방문은 줄었고, 사적 공간 중심의 생활이 정착되었습니다.
구술 자료에서는 “요즘은 이웃이 와도 초인종만 누르고 들어오지, 평상에 잠시 앉지 않는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3. 기후와 생활 기술 변화

에어컨·선풍기 같은 냉방 기술의 변화는 여름철 평상의 필요성을 크게 줄였습니다.
예전에는 더위와 생활이 밀접하게 연결되었지만, 현대에는 실내가 여름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기후 조건에 따라 만들어진 생활 공간이 기술 변화로 사라진 대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4. 사회적 시선의 변화

평상은 한때 집안의 소탈함과 자연스러움을 드러내는 상징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낡은 집의 이미지’로 간주되는 경우가 늘었습니다.
특히 도시·농촌 모두에서 “집 앞에 평상이 있으면 오래된 집 같다”는 인식이 확산되며 평상을 유지할 명분이 줄어들었습니다.

평상이 사라지며 함께 사라진 장면들

평상 문화의 소멸은 풍경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 위에서 이루어지던 생활 장면들이 함께 사라졌습니다.

  • 저녁 무렵 마을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이던 모습
  • 장날 이야기를 나누고 물건을 비교하던 시간
  • 아이들이 평상 아래서 숨바꼭질하던 기억
  • 어른들이 나란히 앉아 하루를 마무리하던 풍경

이러한 장면들이 사라지면서 공동체의 일상적 소통 방식이 약해졌고, 이웃 간 관계의 밀도도 크게 줄었습니다.

결론

평상 문화의 쇠퇴는 단순한 생활도구의 소멸이 아니라 주거 구조, 계절 감각, 이웃 관계가 함께 변화한 결과입니다. 평상은 집과 마을을 잇는 경계 공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실내 중심 생활과 개인화된 관계 구조 속에서 자연스럽게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평상 문화의 변화는 전통적 생활 감각이 어떻게 현대적 생활 방식으로 재편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